우리의 무해한 하루가 모여 지구별이 회복되도록

[더 스토리 No.6] 여성이 건강해야 지구도 건강해요

함께하는그날협동조합


함께하는그날’ 기업 이야기와 함께 인간 이경미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먼저 협동조합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협동조합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로는 아무래도 후쿠시마 사고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에게 가장 컸던 이벤트는 후쿠시마 사고였어요. 사고 이후 원자력 핵발전소 관련 내용을 찾아보게 되었고 우리가 먹는 먹거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는 생협 매장 하나 없었지만 아이쿱 생협 공급 조합원이었지요. 사실 보다 더 직접적인 계기는 지인들과 함께 고기 구워 먹다 발견한 커다란 주사바늘이었어요. 2014년 1월 제주도에 오게 된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당시 대선이 있었고, 그 결과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고민했었잖아요. 동갑내기인 저희 부부도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해 왔다는 생각과 함께 번아웃이 왔고, 프로 골퍼인 남편의 투어를 고려해 유럽으로 이민도 생각했지요. 그러다 일단 제주도 가서 1년 쉬며 생각해보자 결심했어요. 그렇게 해서 제주도에 와서는 남편의 로망이었던 마당 넓은 집에서 종종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 손님들을 초대해 고기를 굽는데 고기에서 엄청 큰 주사바늘이 나온 거예요. 제주도에서도 생협 조합원으로 무항생제 고기를 공급받아 먹고 있었는데 거기서 주사기 바늘이 나왔으니 놀랍고 의아했어요. 그때부터 생협의 시스템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나. 그런데 알고 보니 제주도가 좀 특이한 상황이더라고요. 제주도 특별법으로 인해 육지에서 냉장육이 못 내려오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니 생협이지만 생협 물품이 아닌 고기를 공급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정육 쪽을 좀 더 알아보고 싶기도 하고 사육장에도 가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고 해서 자연스럽게 생협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사무실에 가서 얼굴도 비추고 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생협 마을모임은 그저 이기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을 때였어요. 내 가족의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활동, 그저 이런 정도였죠. 그런데 그해 4월에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면서 제가 사람들을 이끌고 시청으로 갔어요. 그전까지 생협에서는 외부 활동을 안 했거든요. 1년간 휴식년을 가지자고 했던 그해에 그만 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지요. 원래 저는 개인의 안위에 더 관심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환경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상황들에는 항상 민감했던 것 같아요.

정치적인 상황과 개인적 동기로 제주에 오셨다가 자연스럽게 생태적 각성으로까지 이어지셨어요제주에 오기 전에는 어디서 사셨나요?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살았어요. 대학 때를 제외하고는 이삼십대를 경주에서 보냈고 남편도 경주가 고향이에요. 경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원자력발전소가 있어요. 방사능 폐기장을 경주로 가져오기 위해 시장이 머리를 깎는 곳이니 더 말해 뭐하겠어요. 더한 것이 들어선다 해도 반길 것 같은 경주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아졌어요. 너무나 가부장적인 도시, 세계의 중심인 양 정말 변하지 않는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경주에도 김익준 교수님 등 환경 관련 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저는 경주 환경연합에 회비를 내는 정도였고, 활동에 직접적으로 함께하진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 할 만한 지역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는데 그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삶의 지향이 달라진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곳에 있었지만 그 안에 있지 않아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곳에 매몰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서른 즈음에 뭔가 내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어요. 사실 그전에 청년 이경미는 소녀 가장이었어요. 집안이 가난해서라기보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거든요. 경제적 책임감과 어머니의 건강 문제 등에 매여 사춘기조차 없었는데 서른 넘어 뒤늦게 사춘기가 온 셈이지요. 그때부터 제 인생이 좀 다이내믹해졌어요. 착한 딸 콤플렉스도 있었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보니 생각에만 머물렀다가 이제 경제력도 갖게 되면서 해외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거죠.




 
“경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원자력발전소가 있어요.
방사능 폐기장을 경주로 가져오기 위해 시장이 머리를 깎는 곳이니 더 말해 뭐하겠어요.
더한 것이 들어선다 해도 반길 것 같은 경주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아졌어요.
너무나 가부장적인 도시, 세계의 중심인 양 정말 변하지 않는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처럼 보수적인 사회 안에 갇혀 살아왔던 청년 이경미가 여행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그 세계는 어땠을까 궁금합니다문화충격이 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배낭 하나 들고 간 여행이지만 처음엔 완벽한 자유여행도 아니었어요. 제 안에 여전히 보수성이 남아 있다 보니 친구들과 달리 안전한 호텔 패키지 여행을 다녔지요. 그래도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만 나면 나갔어요.

여행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하셨고 그 경험으로 인해 달라진 점이 있었을까요?
다양한 것들을 접할 수 있었죠.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여러 번 가기도 했어요. 제로웨이스트 아이템을 조사하러 영국이나 홍콩 등지를 다닌 적도 있고요. 당시 제가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름 꽤 유명한 강사였는데 영어를 하니까 외국의 참고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수월했어요. 지금 사업하면서도 영어는 또 다른 도움이 되고 있고요. 돌이켜보면 지나온 경험들이 다 연결되고, 뭐든 생각한 대로 다 되는구나 싶어요.

그렇게 여행을 다니려면 어쨌든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했을 텐데요어떤 일을 하셨나요?
영어학원을 운영했어요. 나름 꽤나 유명한 학원 원장이었죠. 전공을 법학을 했는데 법학을 하면 당연히 사법고시를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고시공부를 좀 했어요. 근데 저랑은 안 맞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엔 공무원 시험도 보고 경찰간부 시험까지 보고 그랬는데 법학 공부를 하다 보면 영어를 참 많이 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건 영어 사교육이었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교육 시장에 뛰어드셨군요그렇게 돈 벌어서 여행도 하시고결혼은 언제 하신 건가요?
서른 조금 넘어서 결혼을 했죠. 사실 남편은 초등학교 친구예요. 어느 날 우리 동네 피아노 학원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고 있다며 같이 밥 먹자고 하더군요. 남자가 서른 넘어 피아노를 배운다기에 피아노 선생님이 예쁜가보다 했지요. 알고 보니 워낙 악기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지금도 골프 관련 일을 하면서 작곡이나 여러 가지 다양하게 배우고 있어요. 내가 가지지 못한 면이라 멋져 보이기도 해요.

경주에서 하시던 일(사교육)과 지금 이곳에서 하시는 일(사회적 경제)은 언뜻 많이 달라 보입니다말씀하신 대로 상당히 다이내믹한 삶의 궤적을 그려오신 듯하네요.
저는 경주에서 영어학원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혔어요. 시험 문제 푸는 것보다 중요한 건 독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주에 와서도 노형동에 학원을 열면서 아예 영어 그림책 도서관도 함께 열었어요. ‘함께하는 그날’과 몇 년 병행하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2018년에 정리했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가르쳤던 제자 하나가 제가 요즘 하는 일을 보고 ‘역시 선생님은 그럴 것 같았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당시에도 비닐봉투를 절대 안 쓰고 아이들 간식 사 줄 때도 통을 들고 가 떡볶이를 사오곤 했대요. 그때는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보다 환경호르몬에 대한 염려가 더 컸을 때였죠. 사람들이 저한테 가끔 언제부터 제로웨이스트를 했냐고 질문하는데 저는 그게 기억이 안 나요. 그냥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그래왔던 것 같아요.


면 생리대 만드는 일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노형에 있을 때였는데 아이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대신 사용하고 수건을 깔아놓고 누워만 있었다는 기사를 접했어요. 5월 28일 세계 월경의 날을 맞아 기획 기사들이 나오던 때였죠. 그때까지 생리대가 없어서 못 쓸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게 어른으로서 참 미안했어요. 저는 그때도 면생리대를 쓰고 있었으니까 마을 모임에서 생리대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당시 마을 모임을 하면 밥 한 끼 먹는 게 다였던 터라 의미 있는 걸 하고 싶었고 그렇게 시작된 게 지금의 ‘함께하는 그날’이에요. 면생리대를 만들어서 처음엔 조합원들에게 강매를 했고요, 그 다음에는 일주일에 딱 두 시간 열리는 세화 벨롱장에서 팔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100만 원씩 팔곤 했어요. 팔고 나면 다시 천을 사서 또 만들고 그랬어요. 수익이 나면 일회용 생리대를 사서 지역사회보장협의체나 이런 데 가서 다 나눠주고. 정말 백 퍼센트 자원봉사로 했어요. 그런데 마을 기업을 하면 5천만 원을 지원해준다는 말을 듣고 복잡한 준비 절차를 거쳐 마침내 마을 기업을 하게 되었지요. 처음엔 20평도 채 안 되는 빌라를 임대해 공간을 마련하고 특수 재봉틀과 원단 사는 데 지원금이 다 들어갔지요. 그래도 벽장에 원단이 가득 차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어요. 그런데 면생리대가 의약외품이라며 불법 의약외품 제조업체로 고발 위기에 처했어요. 당시 일회용 생리대에서 화학물질이 나온다는 보도가 있어서 면생리대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었거든요. 한 달에 1천만 원씩 팔려나가니까 경쟁업체에서 겁을 주려고 한 거죠. 재봉 20년의 실력자인 저희 국장님도 제가 같이 일하자고 끌어들인 분인데 사람들의 일자리를 이렇게 빼앗기게 둘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허가받고 제조 관리자 채용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어요.

이후 생리대가 필요한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계속되었는지 궁금하네요.
2016년 지자체도 인식을 같이하게 되면서 지원사업이 시작되었어요. 제가 파악한 바로는 제주시에만 1천 명의 저소득층 대상자가 있었는데, 보건소에 면생리대 석 달 치를 구비해 놓고 그들에게 가져가라고 했더니 한 명도 안 왔대요. 누가 가겠어요. 저 같아도 안 가지……. 그다음에 택배로 보내줄 테니 신청하라고 했더니 그때도 일부만 신청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엔 위생용품만 사는 카드를 만들었는데 그것조차 낙인 효과가 되고 말았지요. 거기까지 가는 데도 1년이 걸렸어요. 그때마다 저희는 가서 항의하고 정책 담당자들에게 의견을 개진하곤 했어요. 이렇게 해서 바뀐 게 현재의 바우처예요. 바우처는 재난지원금을 받는 것처럼 충전이 돼요. 대신 정해진 코드의 제품만 살 수 있어요. 경기도의 일부 지자체는 저소득층만이 아닌, 13~18세 사이의 청소년들에게 다 주기도 하고 서울시도 아직 실행은 못하고 있지만 2년 전에 조례가 통과된 상태예요. 선별이 아닌 보편적 복지로 일회용 생리대를 살 수 있게끔 해주는 지자체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어요. 여기에 더해 저는 면생리대를 주자고 건의해요. 중고등학교 입학할 때 면생리대 10개를 주자고요. 남학생과의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남학생에겐 면도기를 줄 수도 있겠지요. 면생리대는 교복만큼이나 중요해요. 일회용 생리대를 쓰면 발진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안이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고 조례든 법으로든 무상 면생리대를 보급하고 싶어요.


함께하는그날이라는 마을기업도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시는 거네요.
환경은 기본값이고 거기에 여성의 건강이 더해진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여성이 건강해야 지구도 건강한 거니까. 저희는 일반 휴지 대신 면으로 만든 천 휴지를 써요. 면생리대 빨 때 같이 빨면 되니까 말 그대로 제로웨이스트 브랜드가 된 것이지요. 이런 천류는 소창으로 만드는데 어떤 자원봉사자 분이 ‘이거 참 소락하니 좋다’고 하셨어요. 가을 햇살에 마른 빨래에서 나오는 사그락한 느낌이 ‘소락’한 거라고요. 그래서 브랜드명이 ‘소락’이 되었고 지금은 제로웨이스트 생리대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어요. 제로웨이스터라면 소락 와입스를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그런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제품이었죠.

사회적경제기업을 보면 사회적이 앞에 있는 기업이 있고 기업이 앞에 있는 기업이 있습니다어떤 게 먼저인지가 그 기업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데요사회적 가치보다 경제적 이윤추구를 더 우선시하다보면 사회적기업이라는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가져가기 힘든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하는 그날이 사회적기업이 아닌 마을기업을 고수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일자리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지원금 받고 끝나는 사회적 기업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망신스럽기도 하고요. 열심히 해서 잘되는 케이스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저희가 마을기업이다 보니 다들 왜 사회적기업을 안 하냐고 묻는데 마을기업이 좀 심각한 것 같아서 마을기업에 계속 남아 있어요. 마을기업이 잘되는 걸 보여주고 싶고, 마을 단위 공동체 사업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마을마다 컨설팅을 하면서 지구별 가게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최근에 구좌읍 세화리에도 협동조합이 하나 생겼는데 거기에도 지구별 가게가 들어섰어요. 그런 식으로 마을마다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면 좋겠어요.

재정은 어떠세요?
재정은 사실 안 좋아요. 그래도 월급은 받고 있죠. 제대로 받은 지 2년쯤 된 것 같아요. 이제 배당금 받는 게 목표예요. 저희는 초기 출자가 얼마 안 돼 출자를 계속 늘려가고 있고 직원은 1년 이상 근무하게 되면 조합원 가입을 하게 합니다. 이제 믿음직한 팀장들이 함께해주고 있어요. 마을기업도 그렇고 협동조합도 그렇고 저는 끝까지 해서 성공 케이스를 보여주고 싶어요.


함께하는그날이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소셜 미션은 무엇일까요?
여성의 건강과 환경, 거기에 더해 저희는 일자리라고 얘기해요. 물류 같은 현실적 난관을 딛고 제주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잖아요. 일자리 마련을 위해 회사도 조금은 희생하는 부분이 있고요. 내년쯤에는 서울에 지구별 가게를 오픈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긴 한데, 아직 제작의 여력이 안 되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핸드메이드 기업의 한계이기도 한 것 같아요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사실 회사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기계 하나 들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모두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맞아요. O.E.M 하는 곳들 보면 부럽기도 하죠. 저희는 좁은 공방 프로젝트를 주로 해요. 짧게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손익 분기점은커녕 안정화까지 거리가 멀어서 여러 가지 구상만 하고 있어요.

함께하는그날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의 마음이나 기대는 어땠는지도 듣고 싶어요.
사실 제가 상상력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상상해보지 않았어요. 이렇게 많은 인원이 상근하는 조직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희는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곳이잖아요.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 직원을 구하는 게 참 어려워요. 직원들도 힘들겠죠. 저도 대표가 처음인데, 어느덧 5년째 해오고 있네요.

직원들한테는 어떤 대표님이세요?
아마 좀 무서운 대표일 거예요. 예전에 학원 할 때 마음에 드는 강사가 있어 스카웃 제안을 했더니 저한테는 안 오겠다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제가 일을 많이 해서라고 하더군요. 필요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하고 일의 몰입도나 속도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들이 느끼는 일의 강도가 높은 것 같아요. 하지만 모두가 꿈꾸는 것처럼 저도 정시 퇴근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회적경제 신에 들어와서 보니 어떻던가요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나요?
이렇게까지 지원을 해주는데 뭘요. 저희는 초기 자금이나 시설 등 필요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사회적기업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규모이겠지만 저희는 이 정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 영역이라는 온실 안에 있는 거죠.

기업의 대표가 아니라 인간 이경미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저 같은 사람 하나에게 이 일을 맡기고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저를 키우고 싶어요. 이걸 그만두고 싶지만 여기가 사라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나 아닌 누군가가 이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놓고나면 저는 훌훌 떠나고 싶어요. 그래서 일단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실험 중입니다. 일주일을 비웠다가 다음에는 2주일을 비우는 식으로 제가 없어도 되게끔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처음 제주 내려올 때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일하지 않겠다던 결심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꿈꾸는 삶이기도 하지요. ‘함께하는그날이 그리는 꿈에 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세요.
일단 저희는 무상 면생리대를 법제화하고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입학 때 면생리대를 무상으로 주는 게 법제화되면 좋겠어요. 그게 이루어진다면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공장 등 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되겠지요. 그러고 나면 캠핑카에 몸을 싣고 떠나고 싶어요. 캠핑카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시스템만 잘 만들면 됩니다.

그 꿈이 꼭 이루어지시기를 빌겠습니다못 다한 이야기나 꼭 하고 싶은 말씀이 더 있으실까요?
사회적경제기업 대표들이 대부분 저 또래의 여성 대표들입니다. 시작 시점도 비슷해서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작년부턴가 제가 우리끼리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자리를 갖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저도 몇몇 대표와 술 한잔 하고 밥도 먹고 하면서 위로를 많았거든요. 사실 제일 힘든 시기가 대표 1년 차, 2년 차인 것 같아요. 아직 잘 몰라서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힘이 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너무 공적인 자리보다는 부드러운 자리에서 정보도 교환하고 채용 문제나 고민도 나누는 것이지요.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제가 그룹 인터뷰를 제안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습니다제주의 사회적경제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업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함께 나누고 향후 활발한 네트워킹으로 이어져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각자 시행착오들이 있었을 거니까 그걸 좀 줄여가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1년 차는 5년 차에게 궁금한 것들이 있겠지요. 하다못해 저도 다른 협동조합은 배당을 어떻게 하는지, 출자 수당은 얼마씩 주는지와 같은 작은 질문이라도 선배 대표들에게 물어보고 싶거든요.

좋은 제안 감사드립니다꼭 전해드리겠습니다




 함께하는그날협동조합 은 지속가능한 환경 유지를 위해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는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 유통하고 있습니다 . 축적된 경제적/기술적 노하우를 활용해 안전하고 올바른 제품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기농 순면을 활용한 다회용 제품 브랜드 ‘소락’과 제로웨이스트 리빙랩 ‘지구별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쓰레기 배출량 감소, 여성의 월경 및 자궁건강과 관련한 교육, 사회공헌, 지역사회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