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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ol.6

오래된 미래 : 제주 신화의 운명신과 자연에 대한 태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허남춘

제주 신화 중에 <삼공본풀이>는 감은장아기가 운명의 신으로 좌정하여 가는 이야기다. 운명은 무엇인지, 운명은 정해진 것인지, 아니면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려 준다. 그 내용을 보자. 강이영성 이서불은 윗마을에 살았고, 홍은소천궁에 궁전궁납은 아랫마을에 살던 거지였는데 부부가 되어 함께 구걸과 품팔이로 연명하였다. 얼마 후 태기가 있어 첫째 딸아이를 낳았다. 마을 사람들이 은그릇에 죽을 쑤어 먹이고, 이로 인해 ‘은장아기’라 부르게 되었다. 둘째 딸아이가 태어나자 동네 사람들이 놋그릇에 밥을 해 먹이니, 이로 인해 ‘놋장아기’라 불렀다. 셋째 딸이 태어나 전과 같이 나무바가지에 밥을 해다가 먹이니, 이로 인해 ‘감은장아기’라 부르게 되었다.

세 딸이 태어나고 이상하게 운이 틔어 거지 부부는 부자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딸들도 열다섯이 넘는 즈음, 부부는 심심하여 딸들을 불러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 물었다. 큰딸과 둘째 딸은 하늘과 땅의 덕, 부모의 덕으로 산다고 대답했는데, 셋째는 하늘과 땅의 덕, 부모의 덕도 있지만 ‘내 배꼽 아래 음부’ 덕으로 먹고산다고 대답한다. 부모는 화가 나 셋째 딸을 내쫓고, 얼마 후 걱정이 되어 나가보려다 눈이 벽에 부딪혀 둘 다 봉사가 되었다.

한편 집을 나간 감은장아기는 밤이 되어 한 초가에 기숙하게 되었는데, 마를 캐서 들어온 마퉁이 삼 형제를 만나게 된다. 첫째와 둘째는 마를 삶아 대가리와 꼬리를 부모에게 드리지만, 셋째는 살이 많은 잔등을 부모와 감은장아기에게 주자, 셋째가 쓸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와 연분을 맺게 된다. 감은장아기와 셋째 마퉁이는 마를 파던 곳에 가서 주위에 널려 있는 금덩이를 발견하고 부자가 되었다.

살림이 좋아지면서 감은장아기는 부모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되는데, 부모가 거지가 되어 방랑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 거지 잔치를 열어, 결국 백 일이 되는 날에 부모를 만나게 된다. 감은장아기가 자신이 쫓겨났던 딸임을 밝히자 부모는 깜짝 놀라 받아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트리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딸의 배려로 여생을 편안히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운명의 반은 우리가 바꿀 수 있다

감은장아기는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고 물었을 때 자기 복에 산다고 했다. 부모에게 불효한다고 쫓겨나긴 했지만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했다. 집을 나온 감은장아기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길을 떠나다가 마를 캐는 남자 셋을 만나는데, 그중에 가장 바른 생각을 하는 셋째를 자신의 배필로 삼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가장 싹수가 있는 남자를 골라 정한 것이다.

자신은 부모에게 쫓겨난 신세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는 남자를 택하고, 며느리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집에서 나올 때 가져온 금붙이를 팔아 쌀밥을 해드린다. 수렵과 채취를 하는 세상에 들어가 농경문화를 전하는 문화영웅의 모습도 보여 준다. 그 놀라운 밥을 먹은 셋째는 귀한 음식을 얻은 연유를 묻자 금을 보여 준다. 그런 쇳덩이는 자기가 마를 파는 곳에 지천으로 널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금을 캐서 큰 부자를 이루게 된다. 감은장아기의 지적 능력으로 금을 발견하고 부를 이룬 것이다.

그 후 다시 부모의 운명을 바꾸어 드리고 감은장아기는 전상신이 되었다고 한다. 자발적인 능력으로 운명을 개척하여 운명의 신이 된 것이다. 전상이란 전생(前生)에서 왔을 것 같은데, 그 의미는 다르게 쓰인다. 전상은 습(習)과 행위와 마음가짐을 뜻하고, 술을 많이 먹거나 씀씀이가 커서 가산을 탕진하는 행위나 마음가짐을 나쁜 전상이라고도 한다. 한편 전상을 ‘사록’이라고도 하는데, 악한 사록을 내몰고 좋은 사록을 불러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일깨워 준다. 좋은 사록이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모질고 악한 사록을 쫓아버리면 천하 거부가 된단다. 삼공신은 나쁜 인연을 털어내고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는 신, 운명의 신이다.

우리 인생은 전생의 인연에 지배되기도 하지만 과거 인연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도 있는 셈이다. ‘시절 인연’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국화 씨앗에서 나팔꽃이 피게 할 수는 없지만, 가을에 피는 꽃을 봄에 피게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이다. 나쁜 전상을 버리고 좋은 전상을 만나 보자. 스스로 노력하면 얻어진다. 운명의 반은 정해진 것이 있을지라도 나머지 반은 바꾸어나갈 가능성이 열려 있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다.




하늘의 덕이요 땅의 덕이라

부모가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고 물었을 때, 첫째 둘째 셋째 딸 모두 첫머리에 하늘과 땅의 덕을 말한다.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관계만을 관심 두고 관계망을 이야기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우선 하늘과 땅의 고마움을 말한다. 셋째 감은장아기에 비해 첫째와 둘째는 부모에 의존적이었고 셋째에 대해서도 악한 마음을 가졌기에 지네가 되고 버섯이 되는 응징을 당했지만, 그 못난 자식들도 하늘과 땅의 덕을 알고 있다.

마야문명권에서는 인간의 심장을 태양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희생제의를 거행하였다고 하는데 그 연유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마야인들은 자기네가 먹고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푼 하늘과 땅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가장 귀한 심장을 내서 신에게 바치는 의례를 생각해 냈다. 마을의 대표가 축구와 같은 경기를 하고 이긴 팀의 주장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심장을 바쳤다고 한다. 명예적인 죽음과 신성한 제물은 하늘과 땅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구제역이 돌고 AI가 만연하면 반경 500미터 이내의 동물을 산 채로 땅에 묻고, 그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동물을 아무 이유를 묻지 않고 땅에 묻는 우리의 잔인함을 떠올려 보자. 무엇이 잔인한 것인지 반문해 보자. 원시인에게도 동물을 사냥하는 일은 중요한 생존수단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만 사냥했고 사냥감에 대한 보답으로 동물을 숭배하고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했다. 동물을 숭배해야 그들의 먹을거리가 더욱 잘 보장될 수 있었다. 늘 동물을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동물을 위하는 마음과 보답의 마음을 지녀야 했다. 그게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그 생명들에 대해 도대체 어떤 고마움을 표하고 있고 어떻게 보답하고 있는지 반문해 볼 일이다.

우리가 사는 까닭은 자연이 우리에게 무한정 제공하는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풍성한 것은 하늘의 빛이 골고루 비취고 땅이 실어 키우기 때문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면 땅이 머금었다가 만물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늘의 덕이요, 땅의 덕임을 한시라도 잊어선 안 된다. 옛 신화는 우리에게 하늘과 땅과 자연의 고마움을 일깨운다.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마구 파헤치거나 함부로 가져오지 않는 지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하면서 생태계를 파멸로 이끄는 현대인들은 70년 뒤 현대문명이 절벽으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르는 현실을 외면하고 산다. 무한한 욕망을 멈추고 ‘오래된 미래’의 지혜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우리의 운명은 하늘과 땅의 덕을 이해해야 지속 가능하다. 그래야 지구는 50억 년을 더 버틸 수 있다.

글&사진 허남춘

글쓴이 허남춘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 연구소장, 제주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설문대할망과 제주신화』(2017),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이야기』(2016), 『제주도 본풀이와 주변 신화』(2011) 등이 있다. 블로그 ‘허남춘의 슬로시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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