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질 채소가 잇는 동네의 가치사슬
앤드유카페와 골래기네 농장의 ‘소셜체인’ 현장 기록

제주시 한림읍 한림로 518, 비건 식당 앤드유카페 안쪽에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였습니다. 병과 도마, 메모지 위로 판매 시기를 놓친 채소들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채소를 잘라 병에 담아 장아찌를 만들었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요리 수업이 아니라, 버려질 가능성이 컸던 농산물이 다시 쓰이는 과정을 함께 경험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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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가치사슬 사업 ‘소셜체인’ 프로그램으로 열린 이날의 워크숍에는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가 한 공간에 모였습니다. 이 글은 그날 테이블 위에서 이어진 손의 움직임과 대화, 그리고 현장에 남은 몇 마디의 말을 따라가며, 하나의 만남이 어떤 여지를 남겼는지를 기록합니다. |

계절의 끝에서 모인 채소와 사람들
테이블 위에 오른 채소들은 여름을 지나온 시간들을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빨간 비트와 노란 비트, 타켓 비트, 히카마와 롱빈, 당조고추와 비키노 고추, 미니 오이와 스틱 브로콜리까지. 대정읍 일과리에서 골래기네 농장을 운영하는 양경애 농부가 직접 준비한 채소들이 하나씩 소개됐습니다.
가뭄이 길어 히카마는 예년보다 작게 자랐고, 저장성이 떨어져 제때 소비하지 않으면 속이 물러지는 작물입니다. 양경애 농부는 “얘는 빨리 소비를 해야 해요”라고 말하며, 채소의 상태와 시간을 함께 설명했습니다. 이날 장아찌는 설탕을 쓰지 않고, 채소 고유의 단맛과 유산균이 살아 있는 간장을 활용해 일주일 안에 먹는 것을 전제로 만들었습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다르게 쓰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병을 채우는 동안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껍질은 어디까지 벗겨야 하는지, 어느 크기로 잘라야 간이 잘 배는지, 예전 세대의 저장 방식은 어디까지 응용할 수 있는지 묻는 말들입니다. 한 참가자가 “옛날에는 집에서 다 이렇게 해 먹었잖아요”라고 말하자, 양경애 농부는 “그게 다 업사이클링이었어요”라고 응답했습니다. 오래된 생활 기술이 오늘의 언어와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버려질 채소의 시간을 바꾸는 구조
골래기네 농장은 500평 하우스 안에서 다품종 채소를 소량씩 키우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판로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며, 계절 변화와 저장 문제로 시장에서 밀려나는 작물들이 해마다 생깁니다.
양경애 농부에게 남는 채소는 재고가 아니라 실험의 출발점입니다. 판매 시기를 놓친 토마토는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구워 절임으로 만들고, 뿌리채소는 허브와 함께 가공해 다른 요리에 쓰입니다. 건조, 절임, 냉동을 조합하는 방식은 버려질 작물을 줄이기 위한 노동이자, 다음 농사를 위한 데이터가 됩니다.
앤드유카페에서 열린 장아찌 워크숍은 이런 시도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유통 규격에서 밀려난 채소를 소비자가 직접 다루고 맛보는 과정은, 잉여 농산물의 문제를 생산자 혼자 떠안지 않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날 병에 담긴 채소는 곧 사라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간 이야기와 질문은 다음 선택을 위한 기준으로 남습니다.


동네 비건 식당이 만든 유통의 자리
앤드유카페 유혜경 대표는 로컬 비건 식당을 운영하며, 음식 선택이 환경과 연결돼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는 농부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 누구의 채소를 써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장터에서 농부를 만나고, 농사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식당의 메뉴와 매대가 달라졌습니다.
매장 한쪽에 놓인 농산물 매대는 단순한 판매대가 아니라, 농부의 실험이 식당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농부님이 어떤 작물을 가져오셔도 최대한 요리로 쓰려고 한다”는 말처럼, 들어오는 채소에 맞춰 레시피가 바뀌고 손님에게 설명이 더해집니다.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소셜체인’ 프로그램은 이 구조를 한 걸음 확장했습니다. 생산자가 직접 채소를 들고 와 이야기를 전하고, 유통자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소비자는 체험과 설문으로 의견을 남깁니다. 워크숍 이후 남은 기록은 센터로 모여 다음 지원 방향을 고민하는 자료가 됩니다. 동네 식당 안쪽의 한 테이블이 지역 가치사슬의 접점으로 기능한 셈입니다.

세 자리의 말이 만나는 지점
이날 현장에서 만난 세 주체는 각자의 언어로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생산자인 양경애 농부는 “버려지는 작물 없이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농사짓던 시간이 위로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유통자인 유혜경 대표는 “농부의 시간과 정성이 소비자에게 닿는 연결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소비자들은 “버려지는 것 없이 채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농부와 소비자, 유통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모습이구나 싶었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생산과 유통, 소비가 분리되지 않고 한 자리에 놓였을 때, 사회적경제는 설명이 아니라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날 병에 담긴 장아찌는 오래 남지 않습니다. 일주일 안에 먹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손과 말, 기록은 그날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생산하고, 누가 유통하며, 누가 소비하는지 다시 묻는 과정이 이어질 때 비로소 구조가 됩니다. 앤드유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실험은, 지역 안에서 순환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버려질 채소가 잇는 동네의 가치사슬
앤드유카페와 골래기네 농장의 ‘소셜체인’ 현장 기록
제주시 한림읍 한림로 518, 비건 식당 앤드유카페 안쪽에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였습니다. 병과 도마, 메모지 위로 판매 시기를 놓친 채소들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채소를 잘라 병에 담아 장아찌를 만들었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요리 수업이 아니라, 버려질 가능성이 컸던 농산물이 다시 쓰이는 과정을 함께 경험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가치사슬 사업 ‘소셜체인’ 프로그램으로 열린 이날의 워크숍에는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가 한 공간에 모였습니다. 이 글은 그날 테이블 위에서 이어진 손의 움직임과 대화, 그리고 현장에 남은 몇 마디의 말을 따라가며, 하나의 만남이 어떤 여지를 남겼는지를 기록합니다.
계절의 끝에서 모인 채소와 사람들
테이블 위에 오른 채소들은 여름을 지나온 시간들을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빨간 비트와 노란 비트, 타켓 비트, 히카마와 롱빈, 당조고추와 비키노 고추, 미니 오이와 스틱 브로콜리까지. 대정읍 일과리에서 골래기네 농장을 운영하는 양경애 농부가 직접 준비한 채소들이 하나씩 소개됐습니다.
가뭄이 길어 히카마는 예년보다 작게 자랐고, 저장성이 떨어져 제때 소비하지 않으면 속이 물러지는 작물입니다. 양경애 농부는 “얘는 빨리 소비를 해야 해요”라고 말하며, 채소의 상태와 시간을 함께 설명했습니다. 이날 장아찌는 설탕을 쓰지 않고, 채소 고유의 단맛과 유산균이 살아 있는 간장을 활용해 일주일 안에 먹는 것을 전제로 만들었습니다.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다르게 쓰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병을 채우는 동안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껍질은 어디까지 벗겨야 하는지, 어느 크기로 잘라야 간이 잘 배는지, 예전 세대의 저장 방식은 어디까지 응용할 수 있는지 묻는 말들입니다. 한 참가자가 “옛날에는 집에서 다 이렇게 해 먹었잖아요”라고 말하자, 양경애 농부는 “그게 다 업사이클링이었어요”라고 응답했습니다. 오래된 생활 기술이 오늘의 언어와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버려질 채소의 시간을 바꾸는 구조
골래기네 농장은 500평 하우스 안에서 다품종 채소를 소량씩 키우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판로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며, 계절 변화와 저장 문제로 시장에서 밀려나는 작물들이 해마다 생깁니다.
양경애 농부에게 남는 채소는 재고가 아니라 실험의 출발점입니다. 판매 시기를 놓친 토마토는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구워 절임으로 만들고, 뿌리채소는 허브와 함께 가공해 다른 요리에 쓰입니다. 건조, 절임, 냉동을 조합하는 방식은 버려질 작물을 줄이기 위한 노동이자, 다음 농사를 위한 데이터가 됩니다.
앤드유카페에서 열린 장아찌 워크숍은 이런 시도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유통 규격에서 밀려난 채소를 소비자가 직접 다루고 맛보는 과정은, 잉여 농산물의 문제를 생산자 혼자 떠안지 않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날 병에 담긴 채소는 곧 사라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간 이야기와 질문은 다음 선택을 위한 기준으로 남습니다.
동네 비건 식당이 만든 유통의 자리
앤드유카페 유혜경 대표는 로컬 비건 식당을 운영하며, 음식 선택이 환경과 연결돼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는 농부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 누구의 채소를 써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장터에서 농부를 만나고, 농사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식당의 메뉴와 매대가 달라졌습니다.
매장 한쪽에 놓인 농산물 매대는 단순한 판매대가 아니라, 농부의 실험이 식당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농부님이 어떤 작물을 가져오셔도 최대한 요리로 쓰려고 한다”는 말처럼, 들어오는 채소에 맞춰 레시피가 바뀌고 손님에게 설명이 더해집니다.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소셜체인’ 프로그램은 이 구조를 한 걸음 확장했습니다. 생산자가 직접 채소를 들고 와 이야기를 전하고, 유통자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소비자는 체험과 설문으로 의견을 남깁니다. 워크숍 이후 남은 기록은 센터로 모여 다음 지원 방향을 고민하는 자료가 됩니다. 동네 식당 안쪽의 한 테이블이 지역 가치사슬의 접점으로 기능한 셈입니다.
세 자리의 말이 만나는 지점
이날 현장에서 만난 세 주체는 각자의 언어로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생산자인 양경애 농부는 “버려지는 작물 없이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농사짓던 시간이 위로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유통자인 유혜경 대표는 “농부의 시간과 정성이 소비자에게 닿는 연결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소비자들은 “버려지는 것 없이 채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농부와 소비자, 유통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모습이구나 싶었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생산과 유통, 소비가 분리되지 않고 한 자리에 놓였을 때, 사회적경제는 설명이 아니라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날 병에 담긴 장아찌는 오래 남지 않습니다. 일주일 안에 먹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손과 말, 기록은 그날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생산하고, 누가 유통하며, 누가 소비하는지 다시 묻는 과정이 이어질 때 비로소 구조가 됩니다. 앤드유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실험은, 지역 안에서 순환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