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INTERVIEW   |   Aug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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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는 것과 돌을 쌓는 것에 다름이 있는가

돌빛나예술학교 조환진 교장

제주엔 돌이 많다. 화산섬의 검은 돌이 지천에 널려있다. 일찍부터 집에도, 골목에도, 무덤가에도, 밭에도 그 돌을 옮겨 담을 쌓았다. 오죽하면 ‘탐라’라는 이름은 담이 많은 ‘담 나라’에서 왔다는 말까지 있을까. 쉽사리 발에 차이게 많은 것. 그것이 제주의 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한 것의 귀함을 종종 잊는다. 언제나 있는 것의 가치, 희소하지 않은 것의 가치란 무엇일까? 반짝이는 것만 특별하다면, 평범함으로 점철된 우리네 삶의 특별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돌빛나예술학교의 조환진 교장은 돌을 쌓는 자신의 행동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 흔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야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그 안에 숨은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사람, 조환진. 돌담 쌓기의 원칙을 무너지지 않게 쌓는 것, 자연스럽게 쌓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말에서 스스로 업을 세운(創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혜를 배운다.

원칙을 지키고 매일매일 반복하면 느는 것. 설혹 오늘 한 일이 실수라 해도 실수의 경험조차 내일을 더 나은 날이 되게 한다는 것. 돌을 쌓는 일이 과연 삶을 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가장 제주다운 것으로부터 더 나은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제주 사회적경제의 묵직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돌담쌓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언제 돌에 대한 애정이 생겼나요?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살았어요. 군 생활도 제주에서 했으니 육지에 갈 일이 없었죠. 그러다 처음으로 강원도 여행을 갔어요.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정선으로 갔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충격적이었어요. 돌담이 없었거든요. 그때 처음 제주도의 보물은 돌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다른 곳에 없고 제주도에만 있으니까. 그러고 나서 돌담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돌을 쌓고 있는데, 언제부터 돌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요?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돌을 쌓을 거라는 생각은 안했었어요. 미대에 간 것도 그래서였고… 학교에서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으러 다녔어요. 강원도 여행 이후 돌담 그림을 그렸지만 돌담을 쌓지는 않았죠. 졸업하고 처음에 얻은 일자리는 분재예술원이라는 곳이었어요. 조경일을 하려고 갔는데 돌을 쌓고 있더라고요. 3년 후 그만두고 사진을 하고 싶어서 김영갑*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에게 사진을 배웠는데 갤러리 정원 꾸미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셨죠. 그때 돌담을 쌓았어요. 저에게 돌담 쌓는 일의 스승이 있다면 세 분인데, 한 분이 김영갑 선생이고 생각하는정원 성벙영 원장님과 나의 아버지에요. 김영갑 선생은 돌을 쌓을 때 제주 오름처럼, 밭의 머들처럼 울퉁불퉁하고 자연스러운 돌담을 알려주셨고, 성벙영 원장님께는 반듯하게 쌓는 돌담을,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돌담을 알려주셨죠. 사실 김영갑 선생은 돌담을 쌓는 분이 아니었고 그 시절 이미 병이 진행되어 손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발로 바닥에 곡선을 그어가며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리고 저에게 돌담 관련 일을 계속하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둘담과 인연이 깊어 진 것 같아요.

한국의 사진작가. 1957년 충남 부여 생. 1982년 우연히 제주도에 들렀다가 제주의 때묻지 않은 자연에 매료된 뒤, 1985년에는 가족과 인연도 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예 제주에 정착해 사진 찍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2001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사진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2002년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三達里)의 초등학교 폐교를 빌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열었다. 2003년 이명동사진상 특별상을 받았다. 2005년 작고.

©조환진

©조환진

아버지는 돌챙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아들이 돌담을 쌓겠다고 하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80세까지 일을 하셨어요. 그 뒤로는 무거운 돌을 들 수 없으니 그만 두셨죠. 그 시기에 제가 살 돌집을 짓고 싶어져서 아버지께 돌담 쌓는 걸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아버지는 하지 말라고 했어요. 비전이 없다고.

비전이 없다고 하셨어요?

이제 돌의 시대가 아니니까요. 아버지의 기준에서 볼 때 돌은 옛날이 전성기였죠. 80년대 이후 시멘트가 일반화 되면서 돌집은 더 이상 짓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살 집이 필요하니까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지었어요. 쉬는 날 몇 덩이 쌓고, 어쩌다 잠깐 와서 몇 덩이 쌓고 이러니까 한 3년 걸리더라고요. 2005년에 짓기 시작해서 2008년에 완공했어요. 그런데 그 집을 보고 사람들이 일을 맡기기 시작했어요. 돌 쪽으로 주문이 들어오더라고요.

결국 돌담 쌓기가 일이 되었네요. 그럼 그냥 돌담을 쌓는 일을 하면 되는데 학교를 만드셨어요. 돌빛나학교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조경일을 할 때였어요. 어느 별장에 일을 하러 갔는데 돌담 쌓는 사람들도 와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하는 방식이 제가 처음 보는 돌쌓기 공법이더라고요. 저희 보다 일당도 많고 돌일이 좋을 것 같아서 돌담일을 같이 하싶다고 했더니 그 사장님이 “자네는 내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해서 못 배웠어요. 돌담을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주지 않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도제처럼 돌 나르고, 자갈 주워오고, 시멘트 비비는 일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오래 걸려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그럼 나는 앞으로 돌담 학교를 해야겠다. 돌담 쌓는 문화를 대중화 해서 제주도 사람이면 누구나 밭담 정도는 쌓을 수 있게 돌담 쌓기를 가르쳐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관심 갖고 도와주셔서 지금 까지 오게 되었어요.

©조환진

©조환진

©조환진

돌빛나학교를 통해 돌담의 가치를 어떻게 알리고 싶은가요?

제주도에 돌담 관련 단체가 우리 하나 밖에 없어요. 돌은 이렇게 많은데 말이에요. 제주 해녀는 안 그래요. 해녀 학교는 이미 3~4개, 8~9년 전부터 만들어졌죠. 사람들이 해녀에 관심을 가질 때, 돌은 관심 밖인 거예요. 단체가 있어야 돌도 보존하거나 할 때 영향력이 있잖아요. 전통적인 돌담 쌓기 방식도 알릴 수 있고요. 지금 돌빛나학교는 협동조합법인인데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올 여름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가서 그곳의 사례와 경험을 배워오려고 해요. 다른 나라와 차별화된 제주 돌담의 의미를 찾고 알리는 일, 그리고 세계 각 나라의 돌문화를 통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도 돌담이 있군요?

돌이 많으니까 당연히 돌담이 있죠. 영국과 아일랜드에는 돌답 협회가 있어요. 영국은 이미 1969년에 만들어졌어요. 전국조직망도 있어서 돌담 수업이 지역마다 이루어지고 젊은 사람들이 전통방식의 돌담쌓기를 배우러 다녀요.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사례를 배워 와서 제주도의 돌문화를 보존하고 예술적으로 차원을 높이고 싶습니다.

땅속에 숨은 돌을 잘 골라내고, 돌을 쌓을 때 바람의 길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들었어요. 돌을 쌓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돌을 쌓는데 중요한 건 경험이에요. 만져보면 만져볼수록 감각이 늘어요.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니고 감각으로 하는 거예요. 아버지 말씀이 “오늘 쌓아보고 내일 쌓으면 그만큼 는다. 쌓을수록 는다. 내일 하면 더 늘어있다.”고 하세요. 하면 할수록 느는 거죠. 원칙은 단순해요. 맨 아래에 큰 돌,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잘 맞물리게 쌓는 거예요. 하지만 원칙은 다 알아도 하다보면 잘 안돼요. 돌을 굴려오기 힘드니까 가까이 있는 돌을 쌓죠. 그렇게 사소한 원칙에 벗어나면 나중엔 알게 되요. 그렇게 실수를 발견하고 경험하며 늘어요. 돌쌓기를 노동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놀이나 운동, 취미활동으로 보면서 즐기다보면 빨리 늘어요. 작품을 만들듯이 정성을 들이면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담을 쌓을 수 있어요.

 기억발전소(전미정)   사진 하라사진관(한용환)

기억속의 사진 한장

이 사진은 아버지 연세 여든일 때 함께 집을 짓는 모습입니다. 이때는 일은 그만두시고 제 집 짓는 일만 도와주셨어요. 서로 돌담을 쌓는 방식이나 모양새를 두고 많이 싸우기도 했어요. 돌담 쌓기는 배우지 말라고 하셨지만 제 살 집이니 가르쳐 주셨어요. 아버지는 항상 무너지지 않게 쌓으라. 무조건 돌담은 튼튼해야 한다고 하세요. 모양을 예쁘게 하는 건 저희 아버지에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무너지지 않아야 되요.

본래 아버지는 제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죠. 하지만 제가 공부를 못해서 미대를 갔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돌빛나예술학교 교장이잖아요. 아버지는 돌빛나의 선생님이시고요. (웃음)